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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구례 운조루 고택과 지리산 요새 석주관

by 채유니후니 2023. 5. 31.

류이주는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류 씨 가문이 귀만이라 칭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습니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이 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이라고 합니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운조루-사진
운조루

구례 운조루 고택

구례 운조루 고택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와 외수구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합니다.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금환락지, 오보교취, 혹은 오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례 운조루 고택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사랑채와 아랫사랑채의 누마루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이 집은 건평 426.45m²으로 일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목독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입니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류이주의 5 세손인 류제양은 일만여 편의 시를 쓰고 손자 류형업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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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 鳥 樓,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운 조 루

 

www.unjoru.net

석주관성-사진
석주관성

지리산 요새 석주관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요새로,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진한의 경계,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 말에는 왜구가 횡행함에 따라 진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지만,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영이 성을 쌓고 구례 현감인 이원춘에게 석주관 방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750m이며, 높이는 1∼1.5m, 아래 폭은 1.4∼1.5m, 위 폭은 70∼90cm 정도로 대부분이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근래에 들어 다시금 복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석주관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29,96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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