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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신임과 명재상으로 장수한 황희 태종 이방원의 사망과 4대 임금 세종의 친정 시작으로 백화문화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세종은 학문, 예술, 군사, 과학, 음악, 문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뿐만 아니라, 그를 일깨워 주고 등용했던 수많은 명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종 시대 명신 중 가장 신임받았던 황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의 멸망으로 방랑 생활은 한 황희 황희는 1376년 어린 나이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하급 관직을 전전하며 당당히 벼슬 생활을 했지만, 이성계, 정도전이 떠오르며 역성혁명을 꿈꾸던 시기였습니다. 황희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어느 문하나 세력이 없던 그로서는 특별한 입장을 택하지 .. 2023. 6. 30.
고려의 멸망을 초래한 권문세족 기철 여몽전쟁 이후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면서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고려는 문화적, 사회적으로는 예속되지 않은 것으로 인정받았지만 자주권을 잃은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원나라에 빌붙은 부원배나 권문세족이 새로 등장하여 고려의 권력을 빼앗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권문세족은 부패한 사찰들과 공모하여 백성들에게서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으며, 고리대금업까지 강탈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노비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북쪽에서는 홍건적, 남쪽에서는 왜구가 공격해 오면서 고려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고려 충혜왕부터 공민왕까지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려의 멸망을 초래한 인물로 가장 대표적인 권문세족인 기철이 나타납니다. 누이 기황후의 영향력으로 안하무인이 된 기철 기철은 고려시대의 무신인 기자오의 아들로 충렬왕 시대에 .. 2023. 6. 29.
홍의장군 곽재우 &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이 전쟁 대비를 못한 탓에 초기 방어에 실패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전국을 침략하면서 조선 수군이 화포와 판옥선을 사용하여 대처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긴 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은 장기전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여 여러 거점에 왜성을 건설한 뒤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은 이를 반격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 중,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자는 일념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습니다. 의병은 주로 명망 있는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모여 결성되었고, 처음에는 민중 봉기나 지방 자치군의 성격을 띠었지만 조정에서 의병장들을 정식 지휘관으로 인정해 주면서 정부군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의병은 뛰어난 물량의 관군과 함께 전세를 바꾸는 데 큰.. 2023. 6. 28.
조선과 백성을 위한 충신 최명길 최명길(1586~1647)은 최기남의 아들로 태어나 이항복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이원익, 이덕형과 함께 무당파적인 색채를 보였으며, 군사 관련 업무를 맡은 명재상이었습니다. 겨우 20살의 나이로 생원시,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급제하였으며, 공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쳐 승진해 가다가 대북 세력의 견제를 받아 파직되었습니다. 인조반정 모의 이귀, 김류, 신경진, 이서 등의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면서, 최명길은 이귀의 아들 이시백과 친분을 쌓아 인조반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반정 후에는 이조 정랑, 이조 참의,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까지 단기간에 승진하였으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너무 높았기에 많은 반대파를 만들었습니다. 전쟁 때에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 2023. 6. 27.
서로 다른 사상으로 남인을 이끈 허적과 윤휴 남인은 집권당으로서 서인과 달리 만년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남인의 신세에는 유성룡 이후로 중량감 있는 영수가 없었다는 이유와 정세를 뒤집을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큽니다. 그러나 현종 시절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벌어지고 이어 환국 정치를 내세우는 숙종이 즉위하면서 정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은 조선 정치사에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남인을 이끌었던 두 인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년복을 주장함으로 힘을 얻은 허적과 윤휴 허적은 조선시대 남인계 출신으로, 당색을 드러내지 않고 현실 정치에 몸담았습니다. 그리고 산당 정권 아래에서도 순탄히 벼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허적은 1637년(인조 15) 급제해 관직에 올랐으며, 경상도 관찰사, 호조.. 2023. 6. 26.
야학운동과 3.1운동의 본거지 부산 법륜사 법륜사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239-2번지에 위치한 고대 사찰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삼국사기에서 거칠산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곳으로, 1980년에는 금동관, 무기 등이 출토되었던 복천동 고분군과 학소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소대에 위치한, 법륜사 학소대는 학이 집단으로 살았던 곳으로, 옛 동래 성곽이 두르고 있던 동래경찰서 뒤편의 전신전화국, 동래고교 등과 함께 동래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봉황과 함께 사랑한 새 중 하나로 여겨져 오랜 세월 청정의 이미지를 대신해 왔습니다. 부산 동래지역은 유난히 학의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나 대부분 도심의 일부가 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하지만 동래 중심지에 우뚝.. 2023. 6. 25.
수구파에 암살 당한 개화운동의 중심 김옥균 여민루는 과거 아산현 소재지이었던 영인면에 위치한 곳으로, 아산향교와 아산현 동헌 아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여민루는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김옥균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김옥균 선생은 1894년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하였지만, 갑오경장 이후에 복권되었습니다. 김옥균 선생 묘소 그는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이 곳 아산군수를 지냈던 이곳에 묘소가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 동산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양자인 김영진이 1914년 그의 일본 동경의 청산 외 인무덤에 있는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 씨와 함께 합장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그의 업적과 함께 그를 기리고 있는 곳으로, 김옥균 선생의.. 2023. 6. 24.
조선 유교 사회를 지키려 했던 최익현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빠른 속도로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를 관통하며 조선의 유교 사회를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한 인물을 알아볼 것입니다.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1833년에 태어나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김기현에게서 배웠고, 14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이항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서 유학을 연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선비들이 세도가의 문 앞이나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유학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며 칭송을 받았습니다. 최익현.. 2023.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