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여행

조선과 백성을 위한 충신 최명길

by 채유니후니 2023. 6. 27.

최명길(1586~1647)은 최기남의 아들로 태어나 이항복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이원익, 이덕형과 함께 무당파적인 색채를 보였으며, 군사 관련 업무를 맡은 명재상이었습니다. 겨우 20살의 나이로 생원시,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급제하였으며, 공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쳐 승진해 가다가 대북 세력의 견제를 받아 파직되었습니다.

최명길-글씨-사진
최명길 글씨

 

인조반정 모의

이귀, 김류, 신경진, 이서 등의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면서, 최명길은 이귀의 아들 이시백과 친분을 쌓아 인조반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반정 후에는 이조 정랑, 이조 참의,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까지 단기간에 승진하였으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너무 높았기에 많은 반대파를 만들었습니다. 전쟁 때에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는 그의 특유한 성품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한 최명길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후금이 전쟁으로 인한 수익을 얻으려는 야심이 있었고, 조선은 후금과의 전쟁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인프라와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신하들 중 대부분은 결사항전의 뜻을 외치며 후금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명길은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조선이 후금과 화의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명길은 이귀와 함께 후금과 맹약을 맺도록 주장했고, 결국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후금과 조선 사이의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백성을 살핀 최명길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후 최명길은 조선이 최선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부인들과 재결합하기를 거부하는 등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는 이들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도록 주청 하였습니다.

 

또한 최명길은 명나라와 비밀리에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명나라의 살아날 기미를 봐서 명나라와도 통교하였습니다. 이러한 최명길의 외교적 노력 덕분에 조선은 청나라의 아랫나라가 되어 해마다 수많은 공물과 포로들을 보내야 했지만, 왕조와 백성들만은 더 큰 화를 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과 백성을 위한 충신

결국, 최명길은 자신이 모든 죄를 지닐 것을 주장하며 청나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지만, 그는 자신이 조선을 위해 행한 모든 일을 자부하며 자신에게만 죄를 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김상헌과 화해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최명길은 조선의 안정과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조선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안정적인 사회와 국가가 되어갔습니다.

 

최명길은 1645년 사망하기 전까지 조선의 출성과 관련하여 왕조와 백성이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여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그의 행적은 당대와 후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나라를 위한 충성은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최명길은 조선 사회의 병폐를 치료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비변사가 권력을 독점하거나 겸직이 많아 능률이 좋지 않은 현 상황, 사관이나 승지 등에게 왕의 일이 모두 노출되어 한 가지 절차에 얽매이는 현 상황을 개선하라는 주장을 자주 펼쳤습니다. 비록 그의 생각은 반영되지 못했지만, 최명길은 진심으로 조선과 백성을 위한 충신이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