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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수구파에 암살 당한 개화운동의 중심 김옥균

by 채유니후니 2023. 6. 24.

여민루는 과거 아산현 소재지이었던 영인면에 위치한 곳으로, 아산향교와 아산현 동헌 아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여민루는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김옥균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김옥균 선생은 1894년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하였지만, 갑오경장 이후에 복권되었습니다.

김옥균-선생-묘소
김옥균 선생 묘소

 

김옥균 선생 묘소

그는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이 곳 아산군수를 지냈던 이곳에 묘소가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 동산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양자인 김영진이 1914년 그의 일본 동경의 청산 외 인무덤에 있는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 씨와 함께 합장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그의 업적과 함께 그를 기리고 있는 곳으로, 김옥균 선생의 사상과 실천방법이 반드시 옳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업적은 당시 사회 변화를 이끌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흥선대원국과 함께 구한말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일제와 함께 개화운동을 했던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아산향교와 아산현 동헌 아문은 고려시대 말 선종 때 아산현 관아의 중심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산향교는 선종 7년(1479)에 창건되었으며, 선종 10년(1482)에는 이곳에 아산현 동헌 아문이 건립되었습니다. 이후 정치적 변동이 일어남에 따라 여민루는 그의 역사적인 위치에 대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능지처참된 김옥균

김옥균은 1851년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호는 고균이며, 시호는 충달공입니다. 고종 9년, 김옥균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갑신 개혁을 일으키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 후, 김옥균은 1894년 한중일 3국의 제휴를 위한 삼화주의를 제창하려다가 동년 3월 28일 상해 여관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본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후, 총리 김홍집 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 대제학 추증(追贈)으로 충달(忠達)이라는 익호가 부여되었습니다. 김옥균의 묘는 일본 동경 청산 외인 묘지(靑山外人 墓地)에서 정경부인 유 씨와 함께 합장되었습니다. 김옥균은 조선 후기의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국내외에서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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