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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세종의 신임과 명재상으로 장수한 황희

by 채유니후니 2023. 6. 30.

태종 이방원의 사망과 4대 임금 세종의 친정 시작으로 백화문화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세종은 학문, 예술, 군사, 과학, 음악, 문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뿐만 아니라, 그를 일깨워 주고 등용했던 수많은 명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세종 시대 명신 중 가장 신임받았던 황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황희-사진
황희

 

고려의 멸망으로 방랑 생활은 한 황희

황희는 1376년 어린 나이에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하급 관직을 전전하며 당당히 벼슬 생활을 했지만, 이성계, 정도전이 떠오르며 역성혁명을 꿈꾸던 시기였습니다. 황희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어느 문하나 세력이 없던 그로서는 특별한 입장을 택하지 않은 채 살았던 듯합니다.

 

황희는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고려의 유신으로서 잠시 관직을 그만두고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이 두문동 72현이라는 전설 자체가 신빙성이 강력히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황희가 조선 조정에 강력히 반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태조가 고려 유신들을 대거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정책을 펼쳤을 때 황희 또한 조선 조정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강직한 성품 탓에 태종의 심기를 자주 건드렸고, '시류에 영합하는 두루뭉술한 재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예조 판서, 이조 판서, 참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재능만큼은 인정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그를 내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태종은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고 그의 행실을 옹호한 것을 계기로 다시금 파직시켰습니다. 이후 몇 년 간 백수로 지내던 황희는 1422년이 되어서야 세종에게 불러질 수 있었습니다.

 

세종의 정치적 뒷받침이 된 황희

세종이 황희를 조정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국가 발전을 위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을 활용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희는 집현전에서 발굴된 능력 있는 인재 중 한 명으로, 세종이 내던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황희는 사적 이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부 가족들이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은 황희의 평판을 좋지 않게 만들었지만, 세종은 그가 보여준 정치적 능력과 백성을 중시하는 모습 때문에 황희를 계속해서 이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황희는 세종의 정치적 고문이자 제어자로 불려지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정승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며, 그의 명재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단점들은 그가 청렴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직 신청을 냈음에도 세종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관직에 앉아 있을 것을 요구했던 탓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서 총 24년간 지배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무려 90살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종의 아이디어를 견제해 주는 역할을 맡으면서도, 세종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방향성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종의 정치적 업적을 뒷받침하고, 그의 생각을 실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황희는 청렴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세종의 정치적 업적을 뒷받침하고,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명재상은 대대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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