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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독립운동가 이상설 초가집 생가

by 채유니후니 2023. 6. 16.

이상설 생가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 위치한 작은 초가집으로, 멀지 않은 들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상설은 구한말 관료이자 독립운동가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3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진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이후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상설-생가-사진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이상설 선생이 태어난 초가집은 1997년 정화사업을 통해 복원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숭렬사와 숭모비도 이전되어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생가는 일제강점기 이후 무너져 있었지만, 현재는 복원되어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초가집으로, 이상설 생가는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초가집입니다.

 

이상설의 신분은 과거에 급제를 했으므로 높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집은 서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당시 양반 계층 중 상당수는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상설 생가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큰 족적을 남겼던 여러 인물들의 생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상설 생가는 역사적인 가치와 함께 그 시대의 문화를 추억하는 장소로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상설은 독립운동가로, 7세에 서울로 올라와 영어, 노어, 법률을 배우고, 고종 31년에 문과를 급제하여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의 폐기를 상소하고 망명하여 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교포 자녀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고종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펴다가 47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현재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사당 숭열사

이 사당은 이상설 선생님을 모신 사당입니다. 선생님은 1870년에 진천군 산척리 산직말에서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7살 때 이용우의 양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1894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907년 만국 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보호조약의 억울함을 세계에 호소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악전고투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7년에 별세하셨습니다. 1972년에는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맛배집으로 된 사당과 숭보비를 1997년 3월 2일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현재의 사당은 22평으로 중건되었으며, 숭모비의 비문은 이은상 씨가 짓고, 비명은 이범석 씨가 썼으며, 이상복 씨의 글씨로 새겨졌습니다. 비각은 5평 8작의 목조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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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1870년 12월 7일(음력) 충북 진천군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현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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