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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조선시대 절반 가까이 노비가 된 이유

by 채유니후니 2023. 5. 8.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 기관에 묶인 공 (公)노비와 일반 개인에게 속박된 사 (私)노비로 나뉩니다. 공노비는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노비로, 대개는 군사나 관리직을 맡았습니다. 사노비는 개인에게 속박된 노비로, 대개는 가사일이나 농사일을 맡았습니다.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노비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팔리거나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노비제도는 1894년 대한제국으로의 건국과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노비-사진
노비

노비 인구

비율 조선 성종 시대, 전체 인구 330만 여명 중 공노비는 35만 명이었습니다. 사노비를 포함하면 노비 수는 전체 인구의 1/3 이상, 때로는 절반에 달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기준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며, 조선은 양반의 나라이면서 노비의 나라였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은 노비의 애사였습니다.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노비 인구 비중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노비 인구 증가 원인

종천법 노비의 신분은 상속됐습니다. 이 법은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였다면 그 자식은 죄다 노비가 되는 종천법(從賤法)이었습니다. 이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이라고도 불리며, 노(奴)가 양녀(良女)와 결혼하면, 또 비(婢)가 양부(良夫)와 결혼하면, 다음 세대의 노비 인구는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세대는 네 배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노예가 인구의 30~40%까지 많아졌습니다. 더 많아지지 않은 것은 상당수 노비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전체 노비의 대략 30%는 도망 중이었습니다.

노비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노비는 주인의 재물로서 상속, 증여, 매매의 대상이었습니다. 노비의 가격은 666일어치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대개 말 1필의 가격이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정한 노비 가격에 비해 5~6배나 높았습니다.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 제정이 노비의 재산가치를 이렇게나 높였습니다. 이후 노비는 해방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고, 주인의 재산으로 대우받기 때문에 그 인격이 가축이나 물질적 수준으로 추락했습니다. 노비의 이름은 개똥, 말똥, 수캐, 암캐, 마당쇠, 바위 등으로 붙여졌습니다. 노비의 주인은 주로 양반 신분이었으며, 양인도, 심지어 노비도 노비를 소유했는데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5~16세기 중앙의 양반 관료는 아무리 권력이 높아져도 100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습니다. 

노비 소유자

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국왕 자신이 노비를 소유했으며,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 속한 노비는 중종조에 수만 명에 달했습니다. 노비를 소유한 양반들은 부와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비를 대량으로 구매했습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 대우받기 때문에 주인이 불만족하면 언제든지 팔거나,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비들의 불안정한 생활과 인격상의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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