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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서로 다른 사상으로 남인을 이끈 허적과 윤휴

by 채유니후니 2023. 6. 26.

남인은 집권당으로서 서인과 달리 만년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남인의 신세에는 유성룡 이후로 중량감 있는 영수가 없었다는 이유와 정세를 뒤집을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큽니다. 그러나 현종 시절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벌어지고 이어 환국 정치를 내세우는 숙종이 즉위하면서 정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은 조선 정치사에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남인을 이끌었던 두 인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적과-윤휴-사진
허적과 윤휴

3년복을 주장함으로 힘을 얻은 허적과 윤휴

허적은 조선시대 남인계 출신으로, 당색을 드러내지 않고 현실 정치에 몸담았습니다. 그리고 산당 정권 아래에서도 순탄히 벼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허적은 1637년(인조 15) 급제해 관직에 올랐으며, 경상도 관찰사, 호조 참판, 호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왕위에 올라가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효종의 죽음으로 인조의 왕비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고, 효종의 정통성 문제까지 거론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때 남인 인사들인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은 3년복을 주장하며 1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 등 서인들을 비판했고, 이러한 정치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허적은 산당 세력에 맞서는 것은 아니었지만, 3년복을 주장하며 남인의 영수로서의 몫을 다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현종의 눈에 띄게 된 허적에게는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제수하는 등 큰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이때 허적은 송시열의 배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습니다. 1674년 두 번째 예송이 터지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번에는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가 또 무슨 상복을 입어야 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예송에서는 현종과 산당 사이의 논쟁에 가까웠기 때문에 남인이 동참할 기회는 적었습니다. 결국 현종은 산당계 대신인 김수흥을 유배 보내면서 산당 세력이 주춤할 수 있었지만, 예송논쟁을 너무 빨리 끝내버리는 바람에 남인이 권력을 잡을 기회는 놓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혈기왕성한 숙종이 즉위하면서 허적은 남인의 영수로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산당 세력을 빠르게 제외시키고, 허적 등 남인 세력을 등용하여 집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허적은 남인의 영수로서 숙종 정권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조선시대 남인 세력 내 분열의 과정은 국내 정치사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 분열은 탁남과 청남으로 크게 갈라지게 되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각각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탁남, 그리고 윤휴를 대표로 하는 청남이었습니다.

 

윤휴는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남인 세력 내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미미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송논쟁에서는 허목과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 인사들의 상소가 더해져 조정 내에서 남인의 영향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윤휴는 청남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으로 떠오르며, 권력을 향해 도전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남인 세력 몰락

남인 세력은 이후 점점 안일해지면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스캔들에 대처하지 못하거나 윤휴가 여러 물의를 일으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남인 세력은 실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김석주의 공작까지 끼어들면서 숙종의 경신환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허견의 옥사가 벌어지면서 허적, 윤휴, 유혁연 등 남인의 중심적인 인물들이 대거 사사되었습니다. 이때 허적은 이미 71세, 윤휴는 64세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남인 세력의 완전한 실각과 함께, 조선시대 정치사에서의 큰 변곡점으로 남게 됩니다.

 

허적과 윤휴의 서로 다른 사상

허적과 윤휴는 서인과 대립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입장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적은 보수적이고 중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갈등을 만들기보다는 화합을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명확하지 않고 시류에 따르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일을 처리하는 데 균형감과 센스를 갖추고 있었으며, 중요한 때에 발하는 기지가 있어 현종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또한, 상평통보를 보급해 조선의 화폐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게 한 것도 그의 업적이었습니다. 반면 윤휴는 다소 급진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송논쟁의 선봉에 서거나 여러 사람들과 부딪혀 반대파를 많이 낳은 것에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사상은 평가해 줄 만했으며, 군사적인 부분에서도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개혁책들은 현실성이 부족한 북벌론의 기치 아래 나온 것이었고, 대동법에는 반대하는 등 모순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허적과 윤휴는 서로 다른 사상과 입장을 가지며 남인을 이끈 인물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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