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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홍의장군 곽재우 &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by 채유니후니 2023. 6. 28.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이 전쟁 대비를 못한 탓에 초기 방어에 실패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전국을 침략하면서 조선 수군이 화포와 판옥선을 사용하여 대처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긴 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은 장기전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여 여러 거점에 왜성을 건설한 뒤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은 이를 반격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 중,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자는 일념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습니다.

의병은 주로 명망 있는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모여 결성되었고, 처음에는 민중 봉기나 지방 자치군의 성격을 띠었지만 조정에서 의병장들을 정식 지휘관으로 인정해 주면서 정부군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의병은 뛰어난 물량의 관군과 함께 전세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정유재란 즈음에는 조정과의 갈등 끝에 사실상 해산하였습니다. 이때의 의병장들이 조선 의병을 이끌었으며, 오늘은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홍의장군-곽재우-사진
홍의장군 곽재우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시대 역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의병장 중 한 명인 곽재우는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였습니다. 조식의 열혈 기질을 빼닮았기 때문에 특유의 불굴의 정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가문인 현풍 곽 씨는 경상북도 의령에서 세력을 떨치며 명문가로 알려져 있어 곽재우는 어린 시절 유복한 삶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무예에 관심을 갖는 등 평범하지 않은 행적을 보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곽재우는 불혹이 갓 넘은 나이에 전쟁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열혈남아인 곽재우는 왜군을 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가산을 털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수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밀리는 의병이 일본군과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하여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주로 펼쳤습니다. 첫 승리를 거둔 낙동강 하류의 전투에서도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 놓아 적의 수송선단이 전복되도록 유도한 뒤 기습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이런 전투가 수십 차례 이어지며 낙동강을 통해 경상도와 충청도의 병력으로 군량미를 운송하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곽재우는 소문을 이용한 심리전도 적극 구사했습니다. 전투에 나설 때마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신출귀몰한 행적을 보여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차림을 하게 해 분신술을 쓴다는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조선 백성들은 곽재우를 희망과 용기의 상징으로 기억했지만, 반면 일본군은 그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하게 되었습니다.

 

곽재우는 특유의 강경한 성격 때문에 여러 고초를 겪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곽재우는 적군에 맞서 싸우지도 않은 채 도망한 경상 감사 김수의 목을 베라는 저격글을 각지에 돌렸습니다. 이를 보고 분개한 김수가 조정에 곽재우의 죄를 열거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역적으로 몰릴 위기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관아의 군량미를 허락 없이 가져다가 쓴 사실도 밝혀져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경상 초유사 백성들을 위무하는 관리에 임명된 김성일이 그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장본인이었는데, 전쟁이 터진 후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여러 공적을 세웠습니다. 곽재우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려 오해를 푼 것도 그였고, 경상도 지역의 수많은 의병장들을 적극 지원한 것 또한 그였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성일의 지원에 더해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전라도를 공격하려는 일본군 제6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힌 정암진 전투는 그의 최고의 공적으로 평가받습니다. 다른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강경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 광해군의 폐모론을 저지하는 청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정인홍은 조선후기 의병 운동에 참여한 경상도 의병장으로, 조선 후기 의병 운동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 출신으로 유명하며, 곽재우와 김면과 함께 조선 후기 의병 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정인홍은 곽재우처럼 조식의 애제자 출신으로 강한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중앙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동인-북인 등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서인, 남인 등과 정면으로 부딪혔고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인해 많은 반대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고향에 은거해 있을 때 마침 전란을 만나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정인홍은 경상우도에서 조식의 수제자라는 명성을 통해 많은 군사와 지원을 끌어모았고, 수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김면과 곽재우의 지휘 아래 의병이 정규군화 되어갈 때에도 가세해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커진 군세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2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유재란 이후 조선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임이 급격히 떨어져 의병이 거의 모두 해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정인홍은 이미 60이 한참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거병하였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진격 대신에 삼남, 특히 호남 지역을 약탈하고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택했기에 별 활약은 내지 못했지만, 전쟁이 종결된 후 그의 행적을 잠시 알아보도록 합시다.

 

정인홍은 다시 정계로 복귀해 북인의 영수가 되었고,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을 축출하는 등 강경파로서 활동했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했을 때에는 그를 지지한 대북의 영수 자격이 되어 광해군의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1623년 세상을 떠났는데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이 몰살당하면서 그 또한 간신이자 잔인한 정치가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정인홍은 강직한 의병장이자 정치가입니다. 특유의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로 인해 반대파들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은 조선 후기 의병 운동의 역사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인상적인 업적으로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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