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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조선 유교 사회를 지키려 했던 최익현

by 채유니후니 2023. 6. 23.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빠른 속도로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를 관통하며 조선의 유교 사회를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한 인물을 알아볼 것입니다.

최익현-사진
최익현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1833년에 태어나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김기현에게서 배웠고, 14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이항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서 유학을 연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선비들이 세도가의 문 앞이나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유학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며 칭송을 받았습니다.

 

최익현은 명성이 높은 이항로의 밑에서 김평묵, 이중교 등과 함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 후, 최익현은 지방관으로 재직하거나 삼사에 있을 때에는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동안 그의 행적은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비판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때 최익현은 보수적이고 반反 외세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킬 카드를 물색하면서 최익현이 선택되었습니다. 이때 최익현은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더 많이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응해 경복궁의 중건과 폐단을 지적하고 서원들을 다시 건립할 것을 청하며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최익현의 행적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와 관련하여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는 근대 조선의 사회적 발전을 방해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그의 행동은 일부 유학자들과 함께 근대 조선의 변화를 주도한 인물들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위정척사운동 주도

최익현은 근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조선 시대의 최익현은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해 성리학적인 이념을 지켜, 외국 열강들을 막자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이후 위정척사 운동의 선두에 서서 서양과 일본을 강력하게 배척했고,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문호 개방을 중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유배에서 풀려난 후 20년에 달하는 시간이 지났지만 최익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이 고조되고 이항로의 제자들이 연이어 상소를 올릴 때에도 침묵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친일 내각을 성립하는 것을 비판하고 단발령을 반대해 목을 걸었다가 체포됐습니다.

 

을미의병에 미친 영향

이런 그의 행적은 보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익현이 을미사변 이전에 왜 움직임이 없었을까요? 이유는 신하들이 이미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권력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조정 신하들은 최익현의 상소를 읽고 경악했지만, 그들은 최익현을 죄주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의 국문을 명하기는 했지만 국문을 끝내버렸고, 그를 제주도에 위리안치유배형의 일종으로 처벌했습니다.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나고, 이후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하며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전 움직임이 보다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은, 당시 조선이 일본과 외교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익현은 일본에 대한 반감심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최익현의 인생은 그가 대립하는 주체들과 그들의 정치적인 시기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정척사 운동은 조선의 개화와 민족주의를 이끌어냈고, 그의 행적은 나중에 을미의병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최익현의 삶은 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최익현은 고종의 호조 판서와 경기도 관찰사 등의 임명을 받았지만, 유교 사회를 복원하고 일본을 내쫓을 것만을 강조하여 사양하였습니다. 그는 수 차례 상소를 제기하였지만,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이후 외세의 침략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병력과 무기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고 일본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으며, 단식 운동 중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최익현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저항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기득권층에 대한 옹호와 사상의 경직성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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