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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행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손병희와 한용운

by 채유니후니 2023. 6. 20.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천도교, 불교, 개신교 등 종교계 인사들이 포함된 민족대표 33인이 전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계획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만세 운동을 벌이는 것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어 손병희의 집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비폭력 운동을 원했던 일부 대표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계획 변경으로 인해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는 대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요릿집인 태화관에서 낭독했습니다. 계획 변경으로 인해 다소 비판을 받았지만, 민족대표 33인은 종교계 간 화합을 이루어 참여했고 3.1 운동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 민중과 함께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계획을 변경했다는 점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손병희와-한용운-사진
손병희(왼쪽)한용운(오른쪽)

최시형 수제자 손병희

손병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동학 운동, 개화운동, 독립운동 등에서 활동하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손병희는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향리의 아들입니다. 1882년 조카를 통해 동학에 입교하였고 3년 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최시형은 손병희가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아꼈다고 합니다.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강경 동학 신도들(일명 남접)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손병희와 최시형이 있는 북접은 그들과 거리를 두며 동학의 교리를 퍼뜨리고 최제우를 신원하는 문제에만 신경 썼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어 일본이 조정을 장악하는 수준까지 이르자 북접도 동학 농민 운동에 참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손병희는 북접 신도들을 이끌며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했을 때, 최시형을 모시고 원산 지역으로 피신했습니다.

 

나중에 최시형은 송경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했고, 손병희는 그의 뒤를 이어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손병희는 뿔뿔이 흩어진 동학의 교세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조정이 눈에 불을 켜고 탄압하던 시절이었지만 지하에서 신도들을 모으고 교리를 전파하는 등 노력했습니다.

 

아관파천 전후에는 동학이 시대에 뒤쳐졌다는 지적을 새겨들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독립협회 인사들과도 조우해 그들 중 일부를 동학에 입교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손병희에게 동학을 추천한 장본인인 조카 손천민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손병희는 안경 장수로 위장해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망명 생활 도중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남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모습을 지켜보며 동학(1905년에 천도교로 개명)이 시대의 흐름을 더욱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에 따라 신도들 중 24명을 추려 일본에 유학을 보내거나, 신문에 내정을 개혁하고 개화 정책을 펼치자는 기사를 싣는 한편, 개화 조직인 진보회를 조직했습니다. 이용구가 이끈 진보회는 신도들의 머리를 깎고 서양식 의복을 입힌 것처럼 잘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용구는 곧 친일 단체인 송병준의 일진회와 손잡고 변절했습니다.

 

손병희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그들과 아예 결별했습니다. 일본을 이용하랬더니 일본의 개가 되고 만 이용구를 제명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을 경영해 교육 활동을 이끌었고 출판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개막한 뒤에도 천도교가 독립 운동에 보탬이 되도록 힘썼습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일로 징역 3년형을 살고 나온 손병희는 1922년 가족들 앞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손병희는 독립운동가로서 국민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의 노고와 희생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전해주는 역사인물입니다.

님의 침묵 한용운

한용운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국의 광복과 함께 이루어진 역사적인 순간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한국사의 격동기에 농민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설악산 오세암에서 승려가 되기 전까지는 세상의 진리를 탐방하고자 여러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그는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불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교사로 일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불교계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민족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한용운은 대표적인 시집인 《님의 침묵》을 발표하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시집은 그의 뛰어난 문학성과 민족 의식을 내포한 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단지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927년에 이르러서는 좌우 이념, 종교, 사회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은 대형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불교계 대표로서 신간회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또한 찬사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주요 운동에 참여하면서 수감 생활을 겪었고, 1944년 광복을 맞는 것을 볼 수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용운은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업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과 문학, 불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으며, 그의 생애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역사와 함께 작은 부분이라도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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