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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사상으로 남인을 이끈 허적과 윤휴 남인은 집권당으로서 서인과 달리 만년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남인의 신세에는 유성룡 이후로 중량감 있는 영수가 없었다는 이유와 정세를 뒤집을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큽니다. 그러나 현종 시절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벌어지고 이어 환국 정치를 내세우는 숙종이 즉위하면서 정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은 조선 정치사에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남인을 이끌었던 두 인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년복을 주장함으로 힘을 얻은 허적과 윤휴 허적은 조선시대 남인계 출신으로, 당색을 드러내지 않고 현실 정치에 몸담았습니다. 그리고 산당 정권 아래에서도 순탄히 벼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허적은 1637년(인조 15) 급제해 관직에 올랐으며, 경상도 관찰사, 호조.. 2023. 6. 26.
야학운동과 3.1운동의 본거지 부산 법륜사 법륜사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239-2번지에 위치한 고대 사찰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삼국사기에서 거칠산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곳으로, 1980년에는 금동관, 무기 등이 출토되었던 복천동 고분군과 학소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학소대에 위치한, 법륜사 학소대는 학이 집단으로 살았던 곳으로, 옛 동래 성곽이 두르고 있던 동래경찰서 뒤편의 전신전화국, 동래고교 등과 함께 동래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봉황과 함께 사랑한 새 중 하나로 여겨져 오랜 세월 청정의 이미지를 대신해 왔습니다. 부산 동래지역은 유난히 학의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나 대부분 도심의 일부가 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하지만 동래 중심지에 우뚝.. 2023. 6. 25.
수구파에 암살 당한 개화운동의 중심 김옥균 여민루는 과거 아산현 소재지이었던 영인면에 위치한 곳으로, 아산향교와 아산현 동헌 아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여민루는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김옥균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김옥균 선생은 1894년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하였지만, 갑오경장 이후에 복권되었습니다. 김옥균 선생 묘소 그는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이 곳 아산군수를 지냈던 이곳에 묘소가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 동산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양자인 김영진이 1914년 그의 일본 동경의 청산 외 인무덤에 있는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 씨와 함께 합장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그의 업적과 함께 그를 기리고 있는 곳으로, 김옥균 선생의.. 2023. 6. 24.
조선 유교 사회를 지키려 했던 최익현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빠른 속도로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를 관통하며 조선의 유교 사회를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한 인물을 알아볼 것입니다.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1833년에 태어나 김기현과 이항로에게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김기현에게서 배웠고, 14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이항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서 유학을 연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선비들이 세도가의 문 앞이나 기웃거리는 상황에서 유학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며 칭송을 받았습니다. 최익현.. 2023.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