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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2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 연산군이 집권하고 4년 후, 연산군이 22살이 되었을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사림파를 몰아낸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세조찬탈에 의해 공을 세훈받은 훈구파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사림파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국정에 전념하지 않고 사치와 향략에 빠지게 되어 이로 인해 갑자사화와 2년 뒤 중정반정이 일어나 집권한 지 12년 만에 퇴출되고 30살의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연산군이 국정을 위해 힘을 쏟았다면 세조찬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숙청을 당한 갑자사화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갑자사화와 그당시 연산군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2023. 5. 12.
사초가 원인이 된 무오사화에서 유자광의 역할 유자광과 연산군이 사림파를 제거한 1498년의 무오사화는, 무오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사건은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이 때 김일손이 쓴 사초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일손은 춘추관에 활동했던 김종직의 제자였는데, 쓰던 사초에서 문제의 소지가 많은 기록을 자주 실었습니다. 이 중에서는 세조의 불륜 이야기와 단종의 시신을 바닷가에 버린다는 이야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유자광은 이 사건을 주도하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정치 사건 중 하나로 이때의 연산군은 세조의 장남으로, 군과 함께 유자광은 신진사대부인으로 거듭난 이나규 등을 제거한 후 실록 청정을 신설하여 김일손.. 2023.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