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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2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이끈 이원익의 대동법 1598년, 두 차례나 이어진 일본의 침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조선의 승리로 인해 끝났지만, 조선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쓸고 간 국토가 황폐화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다다랐고, 소중한 문화 유산들이 불탔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해 서로를 죽이고 인육을 섭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임진왜란이 준 타격은 상당했습니다. 전쟁 당사자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내전 끝에 에도 막부가 새로이 권력을 차지했고, 조선에서 잡아 간 백성들과 유물들을 이용해 문화 수준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느라 힘을 써 결국 쇠락 끝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명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만주에서 여진족이 급부.. 2023. 5. 16.
대동법을 확대 시행한 김육에 대하여 김육(金堉, 1580년 8월 23일 ~ 1658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에 유학자, 문신,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로 활동했으며,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했습니다. 대동법은 조선 중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대체한 세금 제도였으며, 지방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 거두었습니다. 산간지역 등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서는 삼베, 무명, 동전 등이 거두어졌습니다. 대동법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면서 국가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김육의 가문 조선 중기는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시기였습니다. 이는 연이은 전쟁과 반란으로 인한 것입니다. 김육(1580~1658)은 조광조의 동료였으나 기묘사화 때 죽은 김식의 후손입니다.. 2023.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