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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2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인한 백성의 삶 개선 1852년,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조선 왕실은 후계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이미 차기 임금을 점찍어 둔 신정왕후[1808~1890]는 죽은 상태이며,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바로 12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을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고종은 인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먼 왕족이었습니다. 설명하자면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7대손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 남연군의 자식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이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이며, 조선 역사상 최초로 아들이 왕위에 있을 때 살아 있.. 2023. 5. 7.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궁중생활과 개화의 문제점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 가문의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서 주변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16살 때 흥선대원군 부인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궁중 생활 여흥 민씨가 노론 명문가로 유명하고, 그녀의 양오라비인 민승호가 흥선대원군의 처남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초기 궁중 생활은 썩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한 살 어린 남편인 고종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궁인 이씨를 사랑했습니다. 이씨는 5년 뒤 고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왕실에 자식이 귀했던 만큼 궁인 이씨와 그 아들은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도 3년 뒤에 자식을 낳았지만,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대변을 볼 수 없었던 관계로 .. 2023. 5. 6.